고려시대 최고의 문인 이규보 선생은 말년을 강화도에서 보냈다. 그가 살던 곳이 불은면 두운리 백운동이라고 전해진다. 1168년에 태어난 이규보 선생은 65세의 나이에 몽고에 항쟁하기 위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하는 정부와 함께 강화로 왔다고 한다. 그로부터 세상을 뜨기 1241년까지 9년간 강화에 살면서 주옥같은 글을 많이 썼다. 불은면의 유적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덕진진이 있다.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해안 방어시설인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현종 7년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숙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때는 양현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떄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 군대에 의하여 점령 당하였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누각도 다시 세우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사적 제 226호로 지정되었고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373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광성보는 월곶진, 제물진, 용진진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강화 외성을 쌓았는데 광해군대 다시 고쳐 쌓은 뒤 효종 9년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 되었다. 숙종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다. 영조 21년에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고 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때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싸우다가 전원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 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 되었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 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등이 건립되었다. 사적 227호인 광성보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23-1번지에 소재한다. 광성보 광성돈대에서 동남쪽으로 잘 정비된 길을 따라 300미터쯤 가다보면 언덕의 끝자락에 쌍충비각이 있다. 어재연, 어재순의 숝절비가 이곳에 모셔져 있는데 1871년 미국은 로저스 함대로 하여금 강화도를 치게 한다. 미국은 함상포격으로 초지진을 초토화한 후 덕진진을 점령하고 내쳐 광성보까지 쳐들어온다. 진무중군 어재연은 조선 수비군 600명을 이끌고 광성보에 잠복하고 있다가 상륙하는 미군에 맞서 싸우다 죽음을 맞는다. 어재연은 1841년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에 나갔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광성보 수비를 담당했다. 어재순은 어재연의 친동생이다. 셋ㄹ 위인 형과는 달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하였다고 한다. 형과 함께 싸우고자 광성보로 왔다고 한다. 광성파수순젋는 신미양요 때 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병사들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신미순의총은 미 해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이다. 강화군과 김포시 사이에 있는 손돌목이라는 여울에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왕이 강화로 피난 할 때 손돌이라는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 손돌사공은 물살이 급한 곳을 피해 초지쪽으로 배를 몰았다.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사공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사공이 목을 베도록 명령하였다. 이 때 손돌사공은 왕에게 자신이 죽은 뒤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험한 물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왕과 그 일행은 사공의 말대로 바가지를 띄워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왕은 손돌사공의 충성에 감복해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손돌사공이 억울하게 죽은 날이 10월 20일이었는데, 그 뒤 이 날이 되면 손돌사공의 원혼에 의해 매년 추운 바람이 불어오므로 이를 '손돌바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광성보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해협을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암반위에 만들어진 돈대가 용두돈대이다. 강화외성은 고려 23대 고종이 몽고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한 뒤 해안방어를 위해 초지진까지 쌓은 성이다. 현재 남아있는 성의 길이는 270미터 정도이라고 한다.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인 충목공 허유전 선생의 묘소도 있다. 고려 원종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충렬왕때에는 밀직사사에 올라 지공거가 되어 여러인물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오두돈대는 화도돈대에서 해안로를 따라 남쪽으로 1km쯤 내려가다 보면 바다쪽으로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동쪽과 남쪽은 경사가 급하고 평면은 원형이다. 돈대에서 동남쪽으로 난 오솔길 아래에 오두정 정자터와 강화전성이 있다. 해문방수비는 덕진진 덕진돈대 뒤에 세워져 있다. '해상 관문을 막아 지킬 것이니 타국의 선박은 삼가고 통과하지 말라'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퍽화비와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비석이다. 외국 배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경고비라고도 부른다. 해문방수비는 표면적으로 외국 선박에 대한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조선 특히 강화도의 주민 및 군사들에게 국가의 대외항쟁 의지를 강조하여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생활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돈을 훔치는 꿈-해몽 (0) | 2017.03.26 |
---|---|
티스토리 초대장 드립니다 (70) | 2017.03.22 |
구글 애드고시 도전기2(최종승인)팁 (0) | 2017.03.17 |
티스토리 초대장 6장 남았네요, 배포해 드립니다. (52) | 2017.03.09 |
구글 애드고시 도전기 (0) | 2017.02.26 |
유방암을 이기는 법 (0) | 2017.02.18 |
세시풍속(歲時風俗) (0) | 2017.02.18 |
강화의 민간신앙 (0) | 2017.02.17 |
재미로 보는 로또운세와 사주(일진) (0) | 2017.02.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