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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강화의 민간신앙

어느 지역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우선되는 것이 그 지역의 토속신앙, 즉 민간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민간신앙은 개인의 사상이나 감정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 하지 않고서는 그 지역의 전통적 성향과 생활상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화도는 섬지방이라 많은 민간신앙이 전승되어 왔다. 관광지로 변모하면서 만히 사라지고 없지만 현재까지 계승되어 내려오는 민간신앙은 다음과 같다.

 

 

성주신, 성주신은 가정에서 섬기는 여러 신 가운데 우두머리로 집을 지키고 집안의 모든 운수를 관장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집의 중심이자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들보 밑에 성주기둥을 마련하고 그 기둥에 무명천, 삼베, 한지를 차례대로 걸어놓은 뒤 쌀을 담은 작은 주머니를 얹거나 매달아 놓는다. 해마다 햇곡식이 나오는 음력 시월에 날을 잡아 신물을 새로 만들어 갈아준다. 터주신: 집터를 비롯하여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관장하는 신으로 지신, 터주대감등으로 불린다. 땅을 함부로 파헤치면 동티 난다고 하는데 이는 터주신이 노했다는 뜻이며 터주신이 도와야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 터주를 모시는 집에서는 마당 귀퉁이 또는 장독대 옆에 터줏가리를 세워놓고 명절이나 안택굿을 할 때 따로 상을 차려 위한다. 대감신: 무속에서 위하는 대감신의 신격은 무기를 잘 다루는 무신으로 30종류가 넘을 정도로 많으며 굿을 할 떄도 대감굿이 주축이 될 정도로 중요시 한다. 민가의 대감 역시 집터를 지키고 재물을 불러들이며 가족의 수명을 관장하는 중요한 존재로 믿고 있다. 무당이 대감굿을 할 때 부르는 무가중에 "욕심 많은 내 대감 탐심 많은 내 대감 대양푼에 갈비찜을 소양푼에 영계찜을 양지머리 걸안주에 원시루 독반을 받던 대감"이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로 욕심이 많은 존재여서 고사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내야 소원을 들어준다고 믿는다. 제석은 원래 불교에서 불법과 불자를 보호해주는 호법신으로 숭앙하는 존재인데 민간에서는 농작물의 결실 또는 인간의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 받아들인다. 가신으로서의 제석은 안택굿을 통해 모셔지며 제석단지라고 하는 흰 항아리에 쌀을 담은 신체를 부엌 찬장 위에 안치한다. 일년에 한번 고사를 지내며 육류를 일체 쓰지 않고 백설기만 차려 놓는다. 칠성신: 북두칠성을 뜻하는 칠성신은 자손들의 수명장수를 주관하는 존재로 믿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동제를 지내기도 한다. 깨끗한 한지에 자손들의 이름과 사주를 적어 함이나 상자속에 넣은 뒤 아랫방 선반 위에 올려 놓는데 이를 칠성단자라고 하며 장독위에 청수사발을 올려놓고 자식들의 무병장수를 빌어주는 것이다. 별상신은 중국의 민간신앙이어서 호구별성이라고 하다가 차차 별상대감으로 변형되었다. 별상은 천연두를 주관하는 신령으로 호구별상이라는 말 자체가 천연두의 원래 이름이었으며 성질이 매우 심술맞고 변덕스러워 무속에서는 가장 골치 아프게 여기는 존재이다. 옛날에는 중국과 가까운 강화도에서 별상을 많이 모셨으므로 강화도 색시를 며느리로 맞으면 별상까지 따라온다 하여 강화도 여자와 혼인하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애기씨는 해안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속신이고, 장군신장은 굿을 할 떄 작두나 칼, 창과 같은 병장기를 무구로 다루는 만신을 상징하는 신상이다. 또한 정씨대신이나 박씨대신등은 신당의 대를 이어간 신모 가운데 주요 인물의 신상이다. 이처럼 변형된 무속행위는 중국과 가장 가까운 해상교통로로 사신의 왕래가 잦았던 강화 지방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강화도가 우리나라의 대표 역사 유적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때라고 한다. 고려궁지와 이방청, 갑곶돈대, 연무당, 덕진진, 초지진, 광성보등 수많은 유적지들이 이 때 정비되었다고 한다. 해마다 음력으로 4월 24일이면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조선수비대 대장 어재연 장군 휘하 352위의 충절을 기리는 제향이 광성보 쌍충비각 앞에서 봉행된다. 어재연 장군 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하는 제향에는 장군의 고행인 여주지방 인사들까지 참석하는 큰 행사이다. 그러나 제단에 봉헌된 352위의 신위 가운데 성명을 밝혀 축문을 헌사하는 인물은 어재연 장군과 아우 어재순등 측근 8인에 불과하고 병부에 기록된 무사 49인과 나머지 병사들은 무명용사로 기재하여 합동으로 제향한다고 한다. 이는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죽음을 맞은 병사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무력시위에 나선 미국 아시아 함대는 조선 정부에서 통상을 거절하자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5척의 군함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1,230명의 병사와 강력한 화력의 대포 85문을 적재하고 강화도를 침공했다. 함상포격으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초토화시킨 미군은 강호해협의 최후 방어선인 광성보를 공격했다. 변변한 무기조차 없이 광성보를 사수하던 600명의 조선 수비대는 미국의 함상포격이 시작된지 1시간만에 350명의 전사자를 낸 채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날이 1871년 음력으로 4월 24일이었기에 광성제를 그날에 봉행하고 있다.